미국생활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멤버 14게시글 24 활동
저는 미국 시민권자입니다. 40년이상 살았습니다.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어언어학을 공부하고 그 관련분야에서 지금까지 종사해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연마한 바이올린으로 틈틈이 뉴욕, 뉴저지, 커네티컷 등에서 지역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해오기도 했습니다.
미국관련 주제제한없이 함께 대화해요. 의문, 질문,호기심 등 무엇이든요.
특히 영어관련 질문을 하실경우 충실하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
성별/연령
기입해 주세요.
진접읍
취미/오락
20~70세
앨범
멤버 14
- 몽블랑S남양주진접읍미국거주 40여년 미국시민권자입니다~
- 겨울은호평동남양주 호평입니다 ^^
- 구름소흘읍
- 꽃두리상면
게시글 24
- 아래는 옛날 어느날 혼자 끄적여본거다. 저의 어투가 듣기 거북할 수있을지도 모르나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다. - innate property란 것이 뭘까? 아가들, 한국말 하기위해 밤새워 공부하는 거 봤는가? 어제 외운 단어 오늘 다 까먹었다고 절망하는거 봤는가? 3살짜리가 오케이 자, 오늘은 문장 10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외우고 만다.... 아~근데 6개 밖에 못 외웠어? 나는 왜 항상 이모양이야...난 안돼.... 공부가 안돼....한국말이 늘질않아....졸도하겠당….이러는 아가 봤냐구? 아가들? 언어습득에 관한한 천하태평이다....공부 안한다. 하나도 안한다. 때되면 한다...학원 안 다닌다…그냥 말 한다...신기하기도해라. 걍 한다? 아가들? 때되라 나 말할게, 이거다. 자연스럽게 그런다.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 이말 무궁무진한 진리란 거 알고 있는가? 아가들은 언어를 배우지(learning)않는다. 때되면 그냥 한다(coming to know) 그런다. 진짜 그런다. 신묘막측하기도 해라. 아기들 머리에는 언어를 말하게 하는 이 'innate property’, 즉 가지고 태어난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다. 간난아기 대비, 비교불가 차이로 높은 지능을 가졌다할 중고대학생들이 공부했다는 언어, 그 엄청난 기간, 시간과 돈을 투자해 습득했다는 언어가 돈한푼 들인 적이 없고 밤새워 공부하기는 커녕 단어 하나 외운적이 아가가 구사하는 언어와 비교불가할 정도로 초라하다니! 신기하구나. 저게 도대체 웬일이냐? 언어가 공부해서 습득하는거라면 중고등대학생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해야 하는 것이 옳다...안 그런가? 공부에 도가 터있는 자들이다. 공부에 관한한 공부가 뭔지 알길도 없는 아가들과 이들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natural entity인 이 innate property, 이거? 촘스키 언어학이 그 정체를 파헤치려 영겁의 세월 발버둥쳐 온 것 중 하나다. 한국엄마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영어습득문제관련 다 세계 최고수준의 언어학자더라. 전문가도 저런 전문가가 없고 확신도 저런 확신이 없다. 모르는 자는 모르는게 없다. 맹신? 종교에만 있는게 아니다. 세계도처, 전분야에 걸쳐 맹신이 없는데가 없다. - 딸아이 who is a bilingual 앞세우고 ‘드디어 인류역사상 세계 최초로 영어 완정정복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촘스키 뭐라 엮어 막 소리지르면 한밑천 잡을 가능성 있지 않았을까? 마침 내가 전에 만들어본 미출판 교재에다 마구 저런 소리해대면 말이다. 머리를 평생 그쪽으로 굴렸으면 지금쯤은 아마도....하하 - 다들 행복한 추석 맞이하시길~몽블랑S남양주··전체공감 수2
- 연어 한마리 내가 태어난 고향인 부산을 떠난지 영겁의 시간이 흘렀고 부산을 마지막 가 본지도 십수년이 지난지라, 이번 기회에 코흘리게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아직도 눈에 선한 동네 골목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이번 부산 양정국민학교 제10회 동기모임이 토요일 저녁일 것이라 생각하고 먼 길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내려가 보리라 미리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번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부러 부산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문득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의 대 장정에서 살아남은 연어들은 수역만리 타향에서 어생^^을 즐기다가도 바다를 등져야 할 때가 다가오면 고향을 떠날때 겪었던 고통을 마다 않고 기어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한 다음에야 생을 마감한다. 근자들어 부쩍 고향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아직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종착역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나만 별나게 감상적이 되어 버렸나? 나만 유독 정신력이 쇠잔해 진건가? 뭔가에 쫓기는 것 같다. 기일이 다가와 요일을 체크해 보니 그옛날 코흘리게 시절 동무들과의 역사적인 대면의 날이 토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이었다. 일정상 화요일과 수요일은 좀 그랬다. 결국 이번에는 아쉽지만 어렵겠다는 생각을 굳혀가던 참에 김 영부 동문이 메일 혹은 전화로 모임에 참석할 것을 강요해와-이 글도 실은 김 영부 동문의 강압에 못 이겨 작성하는 것이다-나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일까지도 작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침도 한참 지난 다음에야 당초 생각대로 가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계획을 부랴부랴 취소한 다음 12시 조금 지나 혼자 부산으로 향했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에서 장거리 운전경험이 별로 없는 내가 그 먼 거리를 홀로 운전해 가는 것이 무모한 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내 피로가 엄습해왔다. 이젠 국민학교 시절의 몸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벌써? 나원참… 하루밤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기가 막힌다. 홀로 부산을 향해 운전해 가는 중에 여러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긴 세월 만남이 없었던 연유로 시종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않을까? 누가 돈을 많이 벌었고, 누가 공부를 많이 했고, 누가 잘났고, 누가 출세를 했고.....등에 대화가 지나치게 집중되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지는 않을까? 씁쓸한 기분으로 후회하면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석양무렵 그럭저럭 상당한 거리를 운전해와 언양인가를 지날때 김 영부 동문이 전화를 걸어와 힘내란다. 3~40분 정도 지난 후 부산에 도착하여 영부가 일러 준대로 해운대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수영에 도착하였다. 와~수영! 순간 글로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옛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신작로는 포장되고 주변은 아파트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방향만큼은 게도 잡고 물놀이도 하러 동네 동무들과 오가던, 그 옛날, 그대로였고 경찰 병원인가 육군 병원인가 하는 병원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인 해후였다. 양정국민학교 정문 근처에 위치한 김 원규 동문이 운영하는 옥천숯불갈비 집에서 동문들을 만났다. 박 재우 동문만 옛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았을 뿐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은 없었다. 낯선 얼굴들이었다. (계속, 글자수 제한 때문입니다)몽블랑S남양주··전체공감 수1
- 동무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우려했던 것은 상당부분 기우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간 대화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정다운 옛 동무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나타난 여자동무들, 다 예쁘고 그리 반가울 수가… 박 재우 동문은 연실 여자동무들을 찾아 자리를 옮겨 다니며 성희롱을^^해댔다. 아마도 학창시절 여학생 꽁무니를 무척이나 따라 다녔던 것으로 유명했나 보다. 유일하게 얼굴이 기억나는 것을 보니 하하. 다들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주가 나오고…만취한 동무가 한두 명 나오기도 했지만 노래방 분위기 넘 좋았다. 여자 동문들의 노래솜씨가 대단했다. 조 현숙 친구가 진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현숙이는 어린시절 성악을 공부해 볼까 고민해 보기도 했었단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 옛날 동심으로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밤이 깊어 여자동문들을 시작으로 한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여 새벽 2시경에는 동문 대부분과 작별을 고해야 했다. 새벽 2시가 넘어 이 상은, 김 영부, 공 기환과 함께 양정국민학교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운동장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보기도 했다. 그 옛날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갔다.....아….. 부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는 해운대에 위치한 공 기환의 아파트에서 김 영부와 함께 하루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해운대 공기는 정말이지 너무나 상큼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공연히 친근하고 정답게 느껴진다. 이 곳에 내려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간절해졌다. 공 기환과 김 영부는 나에게 온천도 시켜주고 아침도 사 준 다음 나를 송정으로 데리고 갔다. 해변을 따라 펼쳐져 있는 꽃길이 인상적이었다. 도중에 차에서 내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부산 앞바다는 요즘 들어 부쩍 심란해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울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오랜만에 접한 바다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을 반사하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엄마 품처럼 포근했다. 우리는 송정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모닝 캄’에 들어가 다시 정다운 옛 이야기 꽃을 피우기시작했다. 뇌세포에서 다 삭제된 줄 알았는데? 그 옛날 기억들이 고물고물 다 되살아나고 있었다. 공 기환이도 오늘 오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단다. 기환이도 동무들이 보고 싶어, 너무 그리워 미국에서 일부러 한국에 나왔단다. 오전 11시경 이동무들과도 작별했다. 야 느그들 다 잘 살거래이. 학교를 다시 찾았다. 문득 나의 학적부가 보고 싶어졌다. 출결상황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도 무척 궁금했다. 교무실에 들어가 10회 졸업생이라 소개하니 어느 여 선생님이 나를 교감 선생님께 안내한다. 어, 이 건 아닌데. 그냥 학적부가 한번 보고 싶어서 왔는데…. 교감 선생님은 그 옛날의 학적부를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먼저 학교를 안내해 주겠단다. 스토리가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모교 선생의 제의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뭐하고 해서 엉거주춤 교감 선생님을 따라 나섰다. 선생님은 나를 방송실, 회의실 등 학교 구석구석으로 안내하였고,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에 까지 날 데리고 가서 나를 10회 졸업생으로 까마득한 선배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다. 후배들로부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 오래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네. 오늘의 양정 초등학교는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란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피난민 수용소에 다름없는 학교였는데. 궁금했던 학적부는 구경도 못하고 엉뚱하게 학교 소개만 실컷 받고 나왔다. 내가 살았던 동네로 향했다. 동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동네 동무들은 아직도 이름과 얼굴이 기억에 생생하다. 연철이, 연식이, 세종이, 우야, 홍식이, 영일이, 영환이, 중식이……. 내가 살았던 집터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주인장에게 까마득한 옛날에 이 곳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며 반갑게 말을 건넸으나 영 반응이… 점심 시간인데도 손님이 없다. 지금 파리날려 속이 거북한데 내가 30여 년 전에 그 곳에서 살았건 말았건 그게 그 양반에게 뭔 상관? 기본 골격은 옛날 그대로인 가옥들도 여러 채가 있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옛날의 나를 소개하며 상황을 설명했으나 그 먼 옛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보고픈 옛 동무들도 모두 고향을 등진 모양이었다. 동네를 둘러 보는데 허름한 가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도 그 자리에 가게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혹시….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누고’하고 나오는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낯이 익은 것 같았다. 홍식이 어머니였다. 그 옛날 매일같이 그 가게 앞에서 애들과 뛰어 놀았고, 홍식이 어머니는 이에 세숫대야로 물벼락을 쳐대는 등 딴 데 가서 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얼굴 윤곽이 아직까지도 나의 뇌세포 속에 또렷하게 입력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복되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연로하신 홍식이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나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대화가 지속되던 중에 홍식이 어머니가 갑자기 무릎을 치시더니 ‘아, 니가 바로 그 상이군인 집 아들이 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덥석 잡으셨다. 드디어 나를 알아보신 것이다. 홍식이 어머니는 일찍부터 혼자된 몸으로 반세기동안 그 곳에서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한 치의 이동도 축소도 확장도 없이 옛날 모습 그대로 이 가게를 지켜왔단다. 당시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고 했다. 한 집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갔다고 했다. 우리 집을 시작으로 한집 두집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줄줄이 고향을 떠나갔다고 했다. 다들 먹구 살길 찾아 고향을 등지구 떠나갔다구 했다. 떠나간 후론 한번도, 단 한번도, 고향을 다시 찾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내가 처음이란다. ‘홍식이 좀 보고 가야겠어요’, ‘뭐, 홍식이 말이가’..........‘홍식이, 죽었다. 오래 전에 사고로 죽었다’........‘뭐라고요? 홍식이가 죽었다고요?’………. 홍식이는 2살 아래로 유난히 나를 졸졸 따라 다녔던 녀석이었는데……. 홍식이 어머니는 나와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어렸을 때 홍식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연신 눈물을 흘리신다.………. 자고 가라는 말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하루 밤 자고 가라는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정답게 들렸다. 아마도 고향을 등진 이후, 남으로부터 자고 가라며 손목 붙잡는 정 느껴지는 경험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눈물이 흐른다. 홍식아, 편히 쉬거래이. 이제 부산을 떠나야 하는데도 영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득 부산 앞바다가 다시보고 싶어졌다. 아침에 익환, 영부랑 함께 갔던 곳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상당한 거리를 바다에 인접해 있는 길만 골라 운전해 갔다. 도중에 두번 차에서 내려 바다에 가까이 다가가 서성거려 보기도 했다. 얼마나 갔는지 울산이란 푯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양정으로 다시 돌아와 학교 주위를 한바퀴 돈 다음 저녁 7시경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슬픔과 공허가 엄습해왔다.몽블랑S남양주··전체공감 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