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t looks like you’re visiting from another country. Would you like to update your location to see local content?
    99.0°C

    송제 조동욱 1897~1942 석란

    기타 중고물품 ·

    990,000원

    애장품 한점 보냅니다 사이즈는 2/1 내리닫이 죽절 표구입니다 소장에 후회가 없으리라 사료뒵니다 ‌송재 조동욱(松齋 趙東旭1897~1942) ‌Joh, Dong-Uk ‌선전(鮮展) 및 서화협회전 다수 입상 두산(斗山) 정술원(鄭述源)의 조카사위로서 송재(松齋) 조동욱(趙東)은 한학자 조영하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주 무릉동에 거주하게 된 아버지 조영하가 풍양 조씨로 무릉동에 거주하던 박영두(朴永 斗, 1848~ ?, 高靈人으로 19882년 과거급제, 주민들은 박참판이라 부르고 있으나 관직은 알 수 없다)씨의 사위였던 인연으로 보여 진다. 시청 호적계의 도움을 얻어 조사를 하여보니, 무릉동 544번지의 가대가 조용하 명의로 등기부에 등재된 것이 1915년이다. 즉 송재 조동욱의 나이 19세 때이다. 1921년 송재의 명의로 이전되고, 1930년 그의 나이 34세 때 서울로 이사, 1942년 46세로 서거하게 된다. 그가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까닭은 주로 작품 활동 때문으로 여겨진다. 지금 세전(世傳)하는 것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1930년부터 1942년의 13년 동안에 제작되었고, 1941년 화신백화점에서 개최된 이묵회전(以墨會展)등에도 참가하고 있다. 게 보면 공주거주 16년은 이른바 습작기였다해도 무방하겠다. 조동욱은 호를 송재(松齋), 무릉어인(武陵漁人)이라 하고, 당호를 무릉 무학산하(武陵 舞鶴山下) 양석산방(養石山房) 등을 썼는데 모두 거주했던 무릉동과 연관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평생 오진 난만을 고집했던 화가도 흔하지 않다. 감사가는 소재의 묵난에 대하여 “난을 전공하되 소호 김응원의 법을 주로하고 다시 운미 민영익의 법을 두루 살펴서 법람(泛覽) 필력(筆力이)이 아묘(雅妙)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송재는 당대 인류의 서화가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미나미가 관동군 사령관에서 조선총독으로 영전하여 와서 만주국 황제에게 보내는 사은품으로 송재에게 사란(寫蘭)시킨 ‘묵난화 10곡병’을 진상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송재는 석연 이경배 보다 2년 늦은 1931년부터 선전(鮮展에)에 출품하게 되는데 입선 경력은 다음과 같다(선전 도록에서 인용) 10회(1931년) 墨蘭 2점 입선 제11회(1932년) 石蘭 입선 제13회(1934년) 石蘭 입선 제15회(1036년) 墨蘭 입선 이렇듯 송재는 선전에 출품하면서 동시에 서화협회전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협회전의 입상경력은 다음과 같다. 제13회(1934년) 石蘭 2점 입선 제14회(1935년) 石蘭 입선 제15회(1936년) 墨蘭 입선 1940년 1월 동양예술의 중요한 전통 중 하나인 사군자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취를 감춘 것을 개탄하여, 서예계의 유지인 김영기(金永基), 김진우(金振宇), 조동욱(趙東旭) 등이 서도부흥(書道復興)을 위하여 문인서화연구회 文人書畵硏究會를 결성했다. 더 자세한 점은 구글에 검색해보세요

      채팅 0 · 관심 1 · 조회 47
      명화 의 판매물품
      더 구경하기
      인기매물
      더 구경하기
      당근에서 가까운 이웃과 함께해요.
      지금 바로 다운로드하기
      Download on the App StoreGet it on Google Play